예수님이 하나님나라를 설명하실 때 가장 자주 쓰신 방법은 비유였습니다. 그중에서도 겨자씨와 누룩 비유는 나라의 ‘시작’과 ‘성장’을 동시에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겨자씨는 심을 때는 모든 씨앗 가운데 가장 작은 축에 속하지만, 자라면 새들이 깃들 만큼 큰 나무가 됩니다. 누룩은 반죽 전체에 비하면 아주 적은 양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온 덩이를 부풀게 합니다. 두 비유 모두 같은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시작은 미미하고 눈에 띄지 않지만, 그 안에는 이미 완성을 향한 방향이 심겨 있다는 것입니다.
기대와 다른 시작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의 나라가 웅장하고 즉각적인 방식으로,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사건으로 임할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로마의 압제를 단번에 무너뜨리는 정치적 개입 같은 것 말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정반대되는 그림을 보여주십니다. 나라는 크게 시작해서 점점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보잘것없이 작게 시작해서 자라간다는 것입니다.
나라는 크게 시작해서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에서 시작해 자라갑니다. — 마태복음 13장 묵상 중
오늘의 작은 순종
이 비유는 지금 우리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오늘의 작은 순종, 눈에 띄지 않는 신실함은 종종 하찮게 느껴집니다. 아무 변화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겨자씨 비유는 그 작음이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성장의 시작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과를 당장 보지 못한다고 해서, 그 방향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결과를 빨리 확인하고 싶어 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이 비유가 필요합니다. 나라는 우리의 조급함을 따라 자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자랍니다.
주기도문은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뜻을 놓치기 쉬운 기도입니다. 어릴 때부터 외워온 문장은 습관처럼 입에서 흘러나오지만, 그 안에 담긴 요청이 실제로 얼마나 대담한 것인지는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도 그렇습니다.
대담한 요청
이 짧은 구절은 사실 엄청난 것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막연한 개념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지금 내가 살아가는 자리에 실제로 실현되기를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위안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헌신을 선언하는 기도에 가깝습니다. 나라가 임하길 구한다는 것은, 곧 내 뜻보다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한다는 뜻이니까요.
이어지는 구절,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이 기도의 방향을 더 분명히 해줍니다. 완성된 하늘의 질서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땅의 현실 사이에 다리를 놓는 기도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다시 서는 자리
그래서 이 기도를 드릴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를 다시 그분의 통치 아래에 두는 셈이 됩니다. 오늘 내 계획, 오늘 내가 쓸 시간, 오늘 내가 맺을 관계 — 이 기도는 그 구체적인 자리들에 실제로 무엇을 요청하고 있는 걸까요. 습관적으로 외우던 문장을 다시 천천히 읽어보면, 이 질문이 남습니다.
묵상 질문
오늘 하루 중,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기도가 실제로 적용되어야 할 구체적인 자리는 어디인가요?
복음서를 읽다 보면 예수님이 유난히 식사 자리에 자주 등장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으신 일,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 부활 후 디베랴 호숫가에서의 아침 식사까지. 하나님나라의 가장 중요한 장면들이 유독 식탁 위에서 펼쳐집니다.
경계가 드러나는 자리
당시 사회에서 식탁은 결코 사소한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누구와 함께 먹느냐는 정결과 부정, 신분과 경계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경계를 넘어 죄인이라 불리던 사람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것은, 단순한 친절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님나라에 대한 선포였습니다. 나라가 임한 자리에는 그런 경계가 무너진다는 것을요.
오늘의 식탁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식탁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누구와 먹는지, 누구를 초대하는지, 얼마나 서둘러 먹고 일어나는지 — 사소해 보이는 이 습관들이 사실은 우리가 어떤 나라의 질서를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창일 수 있습니다.
거창한 사역이나 특별한 기회를 기다릴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오늘의 식탁에 누구를 초대할 것인가, 그 질문 하나에서부터 나라를 살아내는 연습이 시작될 수 있으니까요.
묵상 질문
최근의 식탁을 떠올려보세요. 그 자리는 경계를 넘어서는 자리였나요, 아니면 익숙한 경계를 다시 확인하는 자리였나요?
신앙생활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 중 하나는 기다림입니다.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믿으면서도, 여전히 완성되지 않은 현실 — 질병, 불의, 상실, 풀리지 않는 관계 — 을 그대로 안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이에서 조바심이 생기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조바심의 두 얼굴
이 조바심에는 두 가지 얼굴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완성을 서두르다가 지금 주어진 은혜를 놓쳐버리는 조바심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것에만 마음을 쏟다 보면, 이미 와 있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반대의 실패입니다. 지금의 편안함에 안주해서 완성을 향한 소망 자체를 잃어버리는 것이지요.
바울은 로마서에서 온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며 고통 가운데 있다고 말합니다. 이 탄식은 신앙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망을 품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탄식하지 않습니다.
조바심은 종종 신앙의 실패가 아니라, 소망이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조바심을 없애기보다, 가져가기
그래서 이 조바심을 억지로 없애려 하기보다, 그것을 그대로 기도로 가져가는 편이 더 정직한 것 같습니다. 이미 주어진 것에 감사하면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향해 인내하는 것. 그 둘을 동시에 붙드는 자리가, 아마도 ‘이미와 아직’ 사이를 사는 사람의 몫일 것입니다.
묵상 질문
지금 내가 느끼는 조바심은 무엇에 관한 것인가요? 그것을 오늘 기도로 가져가 본다면 어떤 말로 시작하고 싶나요?